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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시인

[ 이 계절의 초대시인] 장석주

 

★ 장석주 시인의 신작시 ★

 

*

저녁이란 장소

저녁입니다. 당신은 해진 신발을 신고 돌아왔어요. 눈은 주황색 피로로 가득하고 당신이 걸친 외투의 소매 끝은 남루했어요. 왜 나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요? 저녁은 텅 빈 손으로 돌아왔어요. 양탄자도 깃털도 카스테라도 없군요. 우리가 양羊과 장미를 지키고, 비와 구름의 양육권을 지키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되겠지요. 나는 상심을 숨기려고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가만히 어루만졌어요. 소금은 흰데 그 안은 어둡습니다. 내가 더 순진했던 걸까요. 내 손이 어루만진 건 표면에 돌기가 돋은 어둠이었죠. 저녁은 뱀과 고독과 실패가 발견되기에 마땅한 장소죠. 검은 우산을 펼치고 숨고 싶습니다. 내게 빨간 장미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여태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늘 소문이 파다했어요. 우리는 여름의 해바라기보다 건강하고 심심했어요. 당신은 이끼류처럼 조용한 자세로 앉아 있군요. 당신의 눈웃음은 녹색 깃발 같아요. 뜻밖에도 당신은 활발하네요. 왜 웃나요? 저녁이 몰고 오는 진흙과 얼음의 기척 속에서 우리는 고요를 떠먹었어요. 식탁에서서 후추통은 치웠습니다. 우리는 밤의 미약한 화부火夫들. 불을 지피면서 밤낮없이 불의 안쪽을 염탐합니다. 봄의 씨앗과 가을의 나뭇잎과 여름의 격류를 지나 저녁의 건너편 쪽에 당신을 숨겼습니다. 당신은 저녁의 안쪽에서 밀가루 반죽에 우리의 슬픔을 버무려 아침에 먹을 빵을 구웠어요. 

저녁입니다. 지금은 자전거를 잃어버린 소년이 돌아올 시각. 당신은 북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주 머뭇거렸어요. 분홍 순모 양말 열두 켤레를 개는 동안 우리의 슬픔은 새로운 형태와 윤곽을 갖겠지요. 나는 쓴 것을 지우고, 그 여백에 가난과 입맞춤, 바다에 떨어지던 빗방울에 대해 겨우 몇 자를 적겠지요. 이 집에 활발한 튤립과 차가운 달, 오래된 문설주와 경첩을 함께 들일 수는 없어요. 등을 보인 채 물가에 서 있는 당신. 오, 당신의 등은 이국의 어두운 거리, 청량한 가난, 혹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침대에 놓인 베개는 강물이었어요. 강물 위에 머리를 뉘기는 쉽지 않았어요. 당신, 눈을 감아보아요. 공중으로 솟구치는 새들! 꿈속에서 강물은 작은 돌들을 씻기며 조용히 흘러갑니다.

 

 

*

두부


멀리서 오는 것들 중 좋아하는 것은 눈[雪]과 은하수와 두부다. 셋 다 불의 기원이나 식인 풍습과는 무관하다. 셋은 다 하얗다. 하얀 것은 눈과 은하수와 두부 말고도 많다. 모유母乳, 새알 껍질, 양은 다 하얗다. 목련, 벚꽃, 찔레꽃도 하얗다. 멀리서 오며 하얀 것들은 마음을 애련하게 만든다.

두부는 새벽에 집으로 온다. 아궁이에 넣은 사과나무 장작에 불이 붙고, 생나무 연기가 오르는 아침, 장작이 타며 타닥타닥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두부를 먹는다. 두부를 향한 식욕은 설레고 기쁜 일이다. 하얗고 흐물흐물 잘 부서지는 이것, 피도 뼈도 없는 이것, 배를 갈라도 내장이 없는 이것, 물고기 같이 미끄러운 비늘도, 네 발 짐승의 몸통을 감싼 털도 없는 이것! 아버지는 버드나무가 선 강가를 한 바퀴 돌아와 두부를 먹는다. 죄 한 점도 없는 두부를 아버지와 한 밥상에서 먹는다. 너무 많은 근심, 불면과 악몽으로 인생을 망칠 거라고 나쁜 생각에 빠지는 사람은 없다. 아침에 먹는 두부는 아침의 종교다. 나는 아침에 물구나무를 선 뒤 두부를 먹고, 흰 눈발 날리는 저녁 영안실을 나와서도 두부를 먹는다.

두부는 명료하며 경이롭다. 두부여, 식물의 겸손이며 비활동성의 능동인 것이여. 춘분의 햇빛과 청명의 이슬, 곡우의 빗방울이 기르는 식물에서 두부가 나오는 것은 놀랍다. 이 맛있고 부조리한 것은 날뛰고 몸부림치는 자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이들, 악에 항의하는 자들, 대개는 평화주의자들이 두부를 좋아하지만 그보다 이마가 반듯한 자들이 더 좋아한다. 우리는 자기 안의 영토로 망명한 자들, 낙담과 실패의 기억으로 슬픔에게 쉴 자리를 내주는 선량한 사람과 더 친해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두부를 좋아하는 이들과 연대할수록 갈등과 혼란들, 인종차별, 국가 간의 유혈 전쟁에서는 더 멀어진다.

아가야, 두부도 밤엔 잠든단다. 꿈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두부. 두부는 그게 진짜 삶이라고 믿는단다. 두부는 별들이 풀밭에 떨어져 이슬방울로 뒹구는 아침에 반짝하며 깨어나지. 아침의 두부는 산소를 마신단다. 아가야, 지칠 때마다 두부를 먹으렴. 너를 기다리게 하는 이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두부를 먹으렴.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두부 먹기를 열망한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두부를 기다린다. 동네 마트에서 누구나 두부를 쉽게 사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누구나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건 문명사회의 승리다. 하얗고 물렁물렁한 두부는 개미 한 마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두부에서 신의 숭고한 자취를 보는 자여, 두부의 내적 고요와 숭고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이슬밖에 없다. 이 숭고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물을 위해 노래하는 시인이 드문 것은 유감이다. 두부에 대한 감수성으로 투명한 시와 철학이 더 번성해야 하리라. 아침마다 먼 곳에서 두부가 온다. 푸른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아침에 순하고 아름다운 것을 먹고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 장석주 시인의 대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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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나무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 울어라, 울음도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시집 『절벽』, 세계사, 2007.

 

*

 

잘못 배달된 화물


때때로 인생이란 잘못 배달된 화물 
몸이란 봉인된 화물 

내 몸 속에 펼쳐지지 않은 한 권의 책 
내 몸 속에 알 낳는 비둘기 암컷 한 마리 
내 몸 속에 종유석이 자라나는 동굴 
내 몸 속에 날개 달린 뱀 쌍둥이 
내 몸 속에 눈이 퇴화한 동굴 박쥐 떼 

태어나자마자 늑대 새끼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고 
말을 배워 앵무새처럼 종알거렸고 
몸속에 온통 독한 회의와 의문들이 
나쁜 암종처럼 출렁거리는 청춘이 왔을 때
나는 비에 젖어 헤매 다녔다 때로 운 나쁜 화물들은
비에 젖은 채 배달되는 법이다

꽃피어나지 못한 채 나는 쓴다
돌에 문자를 새겨 넣듯 고통으로 쓴다
인생이란 무거운 책을 
생의 낱장마다 질척거리는 추억들을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고작 이것이 
내게 배달된 화물이란 말인가?

어느 겨울날 아침 
내게 배달된 화물은 크고 무거웠다 
연약한 팔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화물을 옮기며 
불현듯 깨닫는다
잘못 배달되는 화물도 의외로 많은 법이다 

                          -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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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라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墓碑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落果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丘陵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새앙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市場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 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피안교彼岸橋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 시집 『그리운 나라』, 평민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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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노트 ★

 

시란 한 마리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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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는 처음 쓰는 시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쓴 시는 이미 누군가가 먼저 쓴 시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그래서 전무후무한 시, 세상에 없는 시를 쓰려는 욕망은 늘 실패한다. 실패는 시가 짊어진 숙명이다. 그 숙명을 거스를 수 있는 방식은 광기와 우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미친 상태에서 쓰는 시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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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오래 쓴다고 내공이 쌓이지는 않는다. 상상력을 공작 날개 같이 펼칠 것.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도약을 이룰 것.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듯이. 낯선 방언이 분출한다. 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의 언어적 간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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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되풀이 하는 익숙한 경험들, 즉 침상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이나 닫힌 창문, 머리 감기나 양치질,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 김밥 싸기나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 맛 같이 범속한 경험이나 사물을 낯섦으로 발명하는 것, 그 범속한 체험에서 어떤 창조적 각성과 계기를 겪는 것, 그게 시인의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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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아니라 언어의 이상한 사용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주문呪文 같은 이상한 문장 몇 개를 지어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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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불운과 불행을 지복至福으로 삼고 그것에 걸맞는 언어와 이미지를 찾아주는 것. 사랑하는 이의 머리에 나비 문양의 머리핀을 꽂아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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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호젓한 시간의 만灣에서 부를 수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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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슬픔 따위는 시가 되지 않는다. 길의 고요, 이국의 절경, 말린 정향丁香, 육친의 죽음들! 이것은 시로 변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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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외로운 저녁에 기쁨의 고갈로, 혹은 가난의 한 양식으로 시가 왔다. 맹렬하게 외로울 때, 마음이 광포해진 말 같이 날 뛸 때, 시는 외로움과 광포함의 고삐를 틀어쥐는 일이다. 일요일 오후의 만찬, 육식과 포도주로 위를 채운 뒤의 느긋한 포만감, 그 배부름과 낮잠에는 시가 깃들지 않는다. 그런 찰나에는 결핍과 부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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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열려 있는 문,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어머니가 부재하는 어린 날의 저녁, 사소한 불행에의 감염,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르는 흑백 사진, 순모 스웨터에서 풀린 올, 향을 피운 방, 임종의 순간들, 떠나지 못한 스페인 여행, 여름 오후 베를린의 호텔 방에서 듣던 바람결에 실려 온 밴드 소리, 여름을 맞아 처음으로 맛본 자두의 맛, 불가능한 것에 대한 예감들, 지하창고에 쌓아둔 지난가을 수확한 사과가 내뿜는 향, 까마귀를 기르는 남자, 수요일과 목요일 사이의 마음에 스미던 불안 한 줄기, 습기 많은 여름저녁에 혼자 듣는 빌리 조엘의 노래, 일요일마다 문 닫는 스키야끼 요리집, 그 많은 옛날들, 첫 얼음의 기척, 홍합과 우스꽝스러운 죽음들… 에서 시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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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피해야 할 것들. 모든 형태의 거짓과 과장, 자아도취, 감정 과잉, 언어 낭비 등이다. 시는 늘 연약하고 가느다란 것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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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쓸 때 첫 줄에 모든 것을 건다. 이 우연의 도박에 전 재산을 거는 무모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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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어떤 희미한 기억들, 망각과 무의식만이 시에 깊이를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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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인은 형용사보다 동사動詞를 더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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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와 자전거 페달 밟기는 닮았다. 페달 밟기를 그치면 자전거는 그 자리에서 넘어진다. 시를 쓸 때 페달을 쉬지 말고 밟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의 두 번째 행을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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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전나무들, 여름 한낮의 불꽃으로 뜨거워진 흰 모래밭, 급류와 소용돌이들, 미인의 쇄골, 중력으로 길쭉해지는 빗방울들, 땡볕이 달구는 여름의 돌멩이나 방울토마토 같이 단단하고 탱탱한 시를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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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문법의 일탈이나 약간의 비문非文에 대해 너그러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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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세계의 개시開示다. 도무지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비밀과 수수께끼를 드러내기다. 끝내 실패하고야 마는 것. 범속한 시인들은 그 실패의 언어적 잔해를 시라고 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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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기억을 호명해서 시의 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세계의 현재성과 맞설 힘을 잃어버린 나이든 자의 정신적 나태를 반영한다. 시에 회고적 어조가 부쩍 느는 것은 좋은 징후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무딤과 느슨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좋은 시인이라면 그것을 수치로 여겨야 마땅하다. 좋은 시인은 현재가 품은 무수한 망각과 불확실성에 끈질기게 머물며, 그것에서 불쑥 솟구치는 한줄기 영감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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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며 숙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과거가 낭만적 지옥이라면 미래는 지옥의 유토피아다. 반면 현재는 미래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좋은 시인은 현재에 유언비어로 떠도는 미래의 언어를 훔친다. 종종 좋은 시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예언자의 어투를 흉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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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는 무수한 이명異名 속에 숨었다. 이명은 그의 가면이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문체와 별자리도 바꿨다. 그는 설렘과 두려움이 없는, 익숙한 현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누군가를 빌려서 망명한다. 오랫동안 조국을 등지고 망명자로 산 그가 버린 조국은 다름아닌 자기 실존이 처한 언어의 진부함, 익숙한 것의 반복, 자아의 백일몽 따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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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애초에 음악화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는 음악을 동경한다. 시는 그 불가능성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하염없는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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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파충류같이 땅에 배를 붙이고 눈높이를 낮춰 세계를 바라볼 것. 그리고 낯설게 바뀐 세계의 눈부심에 잠시 어리둥절할 것.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기. 시는 그것을 낯익은 언어와 이미지로 빚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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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쓸 때 어떤 실패도 두려워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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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질병이다. 생각은 선험先驗의 산물이 아니라 배움과 지식의 흔적이다. 생각은 후천적 학습으로 어느 정도 틀에 박힌 방식에 길들여진 결과물이다. 생각이란 그릇은 우리가 빚은 게 아니라 남이 만든 걸 빌려 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각은 광기와 혼돈을 담기에는 그 내구성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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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짐승들이다. 생각하는 짐승이란 사실 생각에 먹힌 상태이다. 생각은 안 보이는 곳에서 짐승의 살을 물어뜯고 피를 들이킨다. 생각의 송곳니와 어금니 사이에는 살점 찌꺼기가 끼어 있고, 핏물이 묻어 있다. 생각은 살아 있는 것의 살과 피에서 얻은 자양분 삼아 연명한다. 생각은 생명 있는 것에 빌붙어 기생한다. 죽음은 생각이 생명의 살과 피를 더는 취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상태다. 생각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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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죽음은 양립할 수 없다. 상극이다. 하지만 어떤 생각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간다. 어떤 생각은 기이하게도 자기 존립의 근거를 없애는 죽음에 몰입한다. 시인 에드몽 자베스(1912~1991)에 따르면 생각은 종종 “전율하는 삶, 웃음 짓는 죽음”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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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쓸 때 생각을 버릴 것. 생각은 자꾸 시를 다듬으려고 한다. 문법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단정한 시는 잘 다듬어진 시다. 지나치게 단정한 시들을 의심할 것. 직관에서 솟구쳐 나온 게 아니라 생각이 양조釀造한 고통 위에 축조된 시는 어딘지 모르게 가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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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나 유추와 논리의 근거인 생각에 앞서 존재한다. 생각은 부재와 현존 사이를 잇는 알리바이다. 우리 존재는 생각보다 그 기원이 먼저다. 생각은 무無나 망각과 싸우는 한 방식이다. “생각은 공허를 짓뜯는 섬광” 2)이다. 더러는 “내가 내 생각이라면, 나는 생각의 돛대다.” 3)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생각은 삶을 지속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끊지 못하는 사람은 흔히 삶에서 결정 장애를 갖고 머뭇거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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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에드몽 자베스. “알아야 할 것이 남았다.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내 생각이 내 이름 안에서 생각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존재하는가. 나는 이제 내 생각으로 인하여, 내 생각의 도래에서 비롯한 도취일 따름이며, 또 내 몸으로 인하여, 몸이 스스로를 치장하며 내비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로써 생각은 자신의 반향을 닫을 사분四分된 장소를 만들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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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기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존재한다. ‘나’라는 헛것은 생각의 메아리이고, 생각이 빚은 조형물이다. 생각함 속에 나의 존재가 깃든다. 달리 말하면, 생각이 나라는 존재를 발명한다.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발견/발명되지 못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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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도구는 언어다. 인간의 뇌는 언어의 추상성과 복잡성을 견딜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언어는 우리 존재가 뒤집어쓰고 있는 현존의 외피外皮, 투명한 너울이자 존재의 거푸집이다. 그것이 없다면 마치 집밖으로 쫓겨나 헐벗은 것처럼 추위에 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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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어를 폐기한 뒤 생각을 시작한다. 생각은 언어라는 아주 작은 실마리에서 풀려나가는 그 무엇, 혹은 언어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생각은 가능성의 영역과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나뉘는데, 시인은 생각의 불가능성 뒤에 나타나는 망각의 지평선과, 사물에 대한 몽상이 빚어내는 상상력에 더 기댄다. 진짜 시를 쓰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 생각의 일체 폐기, 그리고 백지 같은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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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란 문화적 관습의 산물이다. 이것은 언어의 집합체, 혹은 혼잡한 덩어리다. 생각은 잡념 속에서 번성한다. 잡념은 영혼의 혼탁한 수다다. 시는 언어 이후다. 시는 언어가 폐기된 침묵이다. 침묵의 두개골을 쪼개는 벼락처럼 내리치는 시만을 신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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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론 ★

 

시라는 간증

허혜정

 

 

1. 재현의 광장에서 
장석주의 신작시를 받아든 필자에게 문득 떠오르는 것은, 1990년대의 장석주 시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90년대 시단에서 장석주만큼이나 젊은 시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인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독자들에게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그의 시집 『햇빛사냥』이나 매혹적인 에세이집들은 왠지 내게 조지 윈스턴의 우수 어린 재즈곡을 언어의 연주로 듣는 느낌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 장석주는 “신서정파” 혹은 “신세대 시인들”이라 시단에서 분류되던 시인들이 가장 시집을 출간하고 싶어 했던 ‘청하출판사’의 오너이자 젊은 시인들의 후견인이었다. ‘청하’에서 발간된 시집만으로도 90년대의 시적 지형이 가늠될 정도이니, 출판인으로서의 그의 문학적 혜안이 얼마나 예리했는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90년대 가장 역동적인 시활동을 전개했던 『시운동』 2세대의 해체동인들, 『슬픈 시학』과 『21세기 전망』 동인시집 등이, 대형서점마다 청하를 위해 마련된 코너에 즐비하게 꽂혀 있었으니 젊은 시인들에 대한 장석주의 영향력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청하는 ‘술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다. 압구정동의 세련된 빌딩에 자리잡은 그의 출판사로 몰려와 『현대시세계』 편집실을 점거하던 그곳은 신세대 시인들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장석주는 수많은 잡지와 언론은 물론 분방한 시인들의 화제로 종종 등장할 만큼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시인이었다. 별달리 발표 기회가 없어 그저 쌓여만 가던 시가 청하에서 시집으로 묶여 나왔던 무렵, 필자는 우리 집에서 건널목 두어 개 건너에 있던 시인의 역삼동 빌라로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다. 다과 트레이를 받쳐 들고 이층 서재로 올라오던 가녀린 아내와, 시인들에게 이름부터 알려진 아드님, 그리고 커다란 창과 서책 가득한 책장들이 인상적이었던 시인의 서재는 환하고 안온했다. 
그는 새해 덕담을 건네주는 대신 청하에서 전집으로 발간된 ‘니체’의 철학과 그의 젊음을 뒤흔들었던 불멸의 저작들에 빠져들었다.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인 세계, 문학의 유토피아를 누리는 시인이 바로 그라고 나는 생각했던가. 감각적이고 혁신적이었던 시 전문지 『현대시세계』는 물론 거대 출판사도 잘 감행하지 않던 인문학 시리즈, 훌륭한 시집까지 숨 가쁘게 쏟아내던 청하출판사가 시인들의 아지트라는 것만으로도 장석주는 퍽 인기가 있었지만, 그의 언어가 내뿜던 광휘로 인해 그 역시 젊은 시인인데도 그 이상의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장석주는 어설프고 가식적인 언어로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운, 날카로우면서도 솔직담백한 화법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서 탐구하는 시인으로서의 긍지는 느껴지되 이른 성공을 한 자본가의 허식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가난, 낙심, 절망”으로 요약되는 그의 청춘기를 엿들었지만, 시인은 신촌 네거리에서 우왕좌왕 마주친 세배 군단을 다시 어딘가로 휘몰아가던 집시들의 왕이었거나 흥겨운 군악대의 리더였을 것이다. 장석주는 필리핀 여가수가 라이브를 하던 인터컨티넨탈의 분위기 좋은 바에서 생맥주를 쏠 만큼 담백한 사치를 즐기기도 했지만, 예술가는 꿈꾸는 존재기에 그저 삶을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댄디즘을 과시하진 않았던 것 같다. 피카소 거리의 페루산 와인을 마시다 말고 그는 지리멸렬한 시단을 날카롭게 공격하기도 했지만, 비평의 투기가 만들어낸 언어의 버블이 꺼져가면 시라는 것도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문학 종말론자의 냉소는 그에게 없었다. 
이런 기억을 필자가 떠올리는 까닭은, 그렇게 유쾌하고 행복하기도 했던 젊은 시절의 파편적인 삽화가 그의 신작시에도 언뜻 엿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장석주는 늘 사려 깊은 언어로 절제된 대화를 하는 시인이지만 그의 시는 강렬한 미의 조각들을 휩쓸어가는 감정의 격류를 느끼게 한다. 시인을 닮은 화자는 외부 세계를 매우 성공적으로 살아가면서도, 끝내 생의 감각을 좇아 다른 길을 가지 못했다는 회한과 상실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래서 필자에게 처음으로 도착한 그의 신작시 파일과는 달리, 두 번째 도착한 파일에서 사리진 작품에 눈길이 멎는다. 신작시 목록에서 사라진 「건널목」은 아마도 권력의 문법이 군림하는 “재현의 광장”이 시인의 언어를 어떻게 통제하고 검열하는지를 읽게 해주는 중요한 시편 같기 때문이다. 재현의 장에서 머무를 ‘장소’를 박탈당한 언어의 난민처럼 왜 시인은 그 인상적인 시를 발표작에서 빼버린 것일까. 그럼에도 시라는 언어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불편한 공적 재현의 장이 필요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면에 수록되지 않을 시편이기에 전문을 옮겨 본다.

새의 안전이 취약한 지역. 사람들이 수군수군 음모를 꾸미고 테러가 발생하는 곳. 고독이 공공재임을 깨닫는 광장의 초입. 첫 연애의 기억을 묻은 봉쇄수도원. 눈[雪]과 눈[目]이 만나는 길 위 간이휴게소. 태극기를 찍어내는 인쇄 공장. 연인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어깨를 기댄 밤의 해안. 계절과 계절 사이에 급격하게 증식하는 멜랑콜리와 악천후가 시작되는 곳. 시청으로 향하는 시위대의 선두가 잠시 머무는 자리. 섬광과 강철로 제라늄 꽃을 만드는 장소. 태고의 봄과 무의식의 노래가 멈춘 곳.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떨어진 장소. 해저海底에 있다는 구리 광산의 입구. 지금은 사방을 둘러봐도 야생 딸기가 사라진 계절의 끝. 이마에 땀이 돋는다. 마음보다 먼저 너에게로 앞서가는 성급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자. 


8월이 온다. 해는 공중에서 타고 있구나.
내 사랑은 과오였을 뿐, 이제 그만 
네 고독이 숨긴 수數와 비밀을 말해다오,

건널목아, 
건널목아.
- 「건널목」 전문


광장은 “시청으로 향하는 시위대의 선두가 잠시 머무는 자리”이다. 지친 시위꾼들을 맞곤 하던 간이휴게소와 “태극기를 찍어내는 인쇄 공장”, “연인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어깨를 기댄” 세종문화회관의 계단 등이 몽타주처럼 흘러간다. 어느 국가에서도 수도의 중심부에 만들어진 광장에는 구호와 노래, 소음과 열광, 반목의 균열의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광장은 군중과 고독, 개인의 언어와 앰프에서 울리는 무대 위의 언어가 맞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악천후’를 비춰준다.
놀랍지는 않지만 광장이 공공의 문법과 언어를 각인시키는 과정에는 일종의 무대적인 연출이 개입한다. 가령 광장을 통제하게 하는 팬데믹 시대의 언어는, 확진자의 숫자와 가파른 증가율, 무증상 확진자의 동선과 전파 가능 지역에 대한 공적 조사와 축적된 정보들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다. 코로나로 인한 치사율 통계 수치는 과학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시민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킨다. 다시 공포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방역수칙을 강제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전에는 자연스러웠던 일상적인 행위를 표준 문법에서 이탈한 ‘반란’으로 억압해도 되는 확고한 근거로 변질된다. 팬데믹 이전에는 그냥 평범했던 일상에 대한 통제, 영업시간 제한 등의 경제 활동에 대한 구조적 변경, 사교 활동도 다섯 명이라는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하며 재택근무 수칙을 위반하는 행위 등은 자칫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위협도 공포의 담론에 동반된다. 시민들의 ‘발’과 다름 없는 전철은 마스크를 거부하는 승객을 거절할 수 있고, 페쇄된 광장을 함부로 쏘다니는 이들은 의료 체계를 붕괴시킬지 모를 테러리스트처럼 박해당할 수 있다는 위협적인 문법은, 광장이라는 것이 국가가 드러내길 원하는 상징적인 가치를 제도화하는 사회적 장(場, champs)이자 스스로를 보편으로 확장시켜간 지배 문법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이다.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도하는 언론은 잘 편집된 무대를 비춰주지만, “합의된 연극”만을 보여주는 무대 뒤의 의도까지는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는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웅성이는 광장의 언어는 분열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문법에 휩쓸려 갈 뿐이다. 광장은 그저 자유롭기를 꿈꾸는 “새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수결의 권력이 전횡하는 장소이기에 시인은 “네 고독이 숨긴 수數와 비밀을 말해다오,”라고 속삭이는 건 아닐까.
그런 방식으로 재현되는 광장의 세계에서 외로운 개인의 목소리는 얼마나 무력하게 짓밟히고 망각되는가. 다수결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슬프고 사소한 개인의 느낌, 생의 기억, 일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머리 감기나 양치질,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 김밥 싸기나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 맛” 같은 일상의 반복적인 체험을 ‘낯섦’으로 드러내는 언어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창조적 각성과 계기”를 경험한 시인에겐 사실 광장도 학교도 없다. 상상력이 그의 광장이고 경험은 교실이 된다. 현실, 진보, 이념 같은 관념과 문법이 지배하는 광장의 언어를 시인은 거절한다. 그것은 언뜻 보면 생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단정한 시”같지만, 영악한 ‘머리’로 축조된 가치의 질서와 그것을 가동시키는 권력에 아첨하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결코 시민의 순종을 유도하는 교리문답이 아니며, 현실의 문법을 가르치는 독본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 곳을 서성이든 광장의 언어 바깥에 서 있는 ‘건널목’의 이방인이다.
그의 자선시가 수록된 『그리운 나라』(1986),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1996),『절벽』(2007)과 그의 창작 노트를 연관 지어 보면, 시에 대한 그의 인식이 작품세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머리’로 축조해낸 “지나치게 단정한 시”를 비판한 것은 주목할 만한 주장이다. 시는 이미 존재해온 말들을 빌려 태어나고, 말들의 생태계 안에 서식하지만, 그 말들의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문법을 거부한다. 시라는 언어의 생명체는 유전의 문법조차 전복하는 돌연변이처럼 기이하고 낯선 상처투성이 언어로 존재한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시”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혁신하고 실험을 가할 수밖에 없는 현대시 그 자체의 운명이다.
하지만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 “실패는 시가 짊어진 숙명이다. 그 숙명을 거스를 수 있는 방식은 광기와 우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미친 상태에서 쓰는 시만이 살아남는다.”(시작노트 <시란 한 마리 동물이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는 결코 멀쩡하고 고분고분한 언어가 아니다. “마음이 광포해진 말같이 날뛸 때” “외로움과 광포함의 고삐를 틀어 쥐”는 순간 가까스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침묵과 비밀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장석주는 틀에 박힌 메시지와 형식, 유형화된 글쓰기가 결코 진짜 시가 아님을 폭로한다.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슬픔 따위는 시가 되지 않는다. 길의 고요, 이국의 절경, 말린 정향丁香, 육친의 죽음들! 이것은 시로 변환되지 않는다!”고 시인은 일갈한다. 구태의연한 문식文飾으로 꾸며진“모든 형태의 거짓과 과장, 자아도취, 감정 과잉, 언어 낭비”에 대한 시인의 경멸은, “광기와 우연”으로까지 치닫는 인식의 해방을 시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자는 ‘간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의 언어적 간증”이라는 그의 언명은, ‘사실’보다는 ‘진실’을 전유하고자 하는 종교적 간원에 가까운 진지성과 자기고백성이 시의 근본임을 시사한다. 전세기의 상징주의 시인들이 ‘숨겨진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의 미를 추구했듯이 장석주 또한 재현된 세계의 난파물 같은 망각, 신비, 우연성, 광기 등을 통해 자기 구원의 언어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신작시도 다양한 모놀로그, 시공간의 배열이 헝클어진 기억의 삽화들, 은유와 상징들이 뒤섞인 혼종적 어법을 구사한다. 시인의 창작 노트는 그런 독특한 스타일과 시적 비전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프롤로그 같아서, 그의 시 쓰기의 비밀을 읽게 해 준다.
“우연과 광기”라고 장석주가 말한 인식의 해방과 종교적 무한성과도 같은 진지성에 의해 시는 매 순간 처음으로 ‘개시’되는 창조의 순간이다. 시인은 이미 재현된 의미들의 권력에 박해받는 이교도가 되어 생의 진실을 되찾기를 원한다. “현존의 외피外皮”인 언어는 “추상성과 복잡성을 견딜 수 있도록 진화”한 두뇌의 산물일 뿐이기에, 그것보다 더 심원한 언어가 필요함을 인식한다. “진짜 시를 쓰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 생각의 일체 폐기, 그리고 백지 같은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장석주가 강조하듯 그는 시라는 것은 사유의 박제물이 아니라 직관과 상상력의 발현이길 소망했다. 시는 세계의 개시開示다. 도무지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비밀과 수수께끼를 드러내기다.”라고 그의 창작 노트는 강조한다. 시인이 진정 신비로운 우주의 ‘개시’를 추구하는 자라면, 독자들 또한 그 개시를 선포하는 ‘주문呪文’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 교환할 수 없는 꿈
장석주의 신작시를 읽기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은, “부재와 결핍”의 대상 혹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어떤 생의 순간이 시에 반복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시인은 일상의 어느 우연한 순간, “망각의 지평선과, 사물에 대한 몽상이 빚어내는 상상력”을 좇아 아직 언어로 태어나지 않은 ‘비밀’을 백지에 ‘받아쓰기’ 시작한다. 시인은 헝클어진 느낌의 매듭을 풀어가듯, 간절하게 돌아가고픈 어떤 그리움의 순간을 회상하곤 한다. 시인이 『그리운 나라』(1986)에서 자선시로 선택한 「그리운 나라」가 바로 그런 사례인데, 이 시편에 밑금처럼 깔려 있는 “상실과 부재”의 아픔은 1980년대의 초기 시부터 최근의 시편까지 매우 일관된 시 쓰기의 동력이 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그리운 나라」에서 상징적이고 신화적으로 재현된 그리움의 대상과 장소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사랑의 원리를 닮은 언어의 치유력을 발견한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최후의 시장市場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경험했을 현실의 문법과는 다른 것이다. 자본의 기계적인 증식을 추구하고, 은행과 증권사에서 자산의 위탁자가 되어 행세하는 속물들을 그는 무수히 마주쳤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영지로 모여든 이들에게 여유롭게 돈을 뿌리는 봉건 귀족을 모방하는 자기 현시의 문법을 말이다. 그런 가식과 외피가 판을 치는 속물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던 숲과 언덕, 열린 하늘과 바람,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교환의 시장에서 진실을 거래하고 심지어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그리운 나라」)던 사랑하는 이들조차 일에 팔아넘겼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덩그러니 상실과 부재의 자리에서 시인은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그리운 나라」)라고 자탄한다. 그리움의 병을 앓는 내면에서 “빈 병실”을 보며 다시는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때문에 상실과 부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언어는 소중하다. “저녁이라는 장소”는 광장과 노동에서 풀려난 시간이고 꿈꾸는 시가 태어나는 장소이다. “당신은 해진 신발을 신고 돌아왔어요. 눈은 주황색 피로로 가득하고 당신이 걸친 외투의 소매 끝은 남루했어요. 왜 나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요? 저녁은 텅 빈 손으로 돌아왔어요.”(「저녁이라는 시간」)라고 시인은 말한다. 당신은 모든 상처의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도록 ‘상심’한 마음으로 저녁이란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 피로와 남루함은 소득조차 없는 자의 탄식이 아니라 낮고 겸손한 언어가 준비되는 시간임을 시인은 노래한다. “우리는 밤의 미약한 화부火夫들” 이어서 화폐로 그 값이 지불되는 노동보다 더 아름다운 노동을 한다. 시 속의 부부가 저녁마다 수확하는 것은 ‘양탄자’와 ‘깃털’ ‘카스테라’ 혹은 “양羊과 장미” 같은 말들이다. 신이 부여한 대리권을 가지고 “비와 구름의 양육권“을 행사하는 시인이 된다.
그래서 “저녁은 뱀과 고독과 실패가 발견되기에 마땅한 장소”이다. 그들은 “밤낮없이 불의 안쪽을 염탐”하듯 모든 사물과 생명들의 비밀을 캔다. “슬픔을 버무려 아침에 먹을 빵을” 굽다 보면 “자전거를 잃어버린 소년이 돌아올 시각”이다. 그런 시간에만 “우리의 슬픔은 새로운 형태와 윤곽”을 가질 것이고 시인은 “쓴 것을 지우고, 그 여백에 가난과 입맞춤, 바다에 떨어지던 빗방울에 대해 겨우 몇 자를 적”을 것이다. 그 언어의 집에는 낡고 부서져갈 “오래된 문설주와 경첩을 함께 들일 수는 없”다. 가난한 부부가 지키는 그 저녁이란 장소는 “이국의 어두운 거리, 청량한 가난, 혹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저녁이란 장소」)이다.
시인은 시가 태어나기 위한 어떤 조건처럼 “부재와 결핍”의 상처를 자주 강조한다. 비정한 교환의 문법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은 이윤 없는 투자와 돈이 되지 않는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저녁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의 시를 쓰기 위해 기꺼이 노동의 피로를 견디는 시인은 무언가를 생산적으로 소비해 부의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지는 않는다. 도리어 자본주의라는 생존의 덫에 붙들려 “가지 못한 길”을 회한과 향수 속에 그리워한다.
오랜 시간 장석주가 발표해 온 시편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메시지 중 하나도“잘못 배달된 화물”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아픔이다. 태어나자마자 시인은 갓난아기의 울음을 터뜨렸고, 현실이 가르치는대로 “말을 배워 앵무새처럼 종알거렸고/ 몸속에 온통 독한 회의와 의문들이/ 나쁜 암종처럼 출렁거리는 청춘이 왔을 때/ 나는 비에 젖어 헤매 다녔다”(「잘못 배달된 화물」)고 고백한다. 인간의 노동은 물론 가치와 신념까지 팔아넘겨야 하는 교환의 시장에서 그는 영혼 없는 자본의 인격화로 간주되는 상품이자 ‘화물’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장소에 배달된 인생은 그를 다치게 했고, 끔찍한 고문을 가했고, 그의 언어를 지배하려 했다.
물론 세계는 누구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공급한다. 갖가지 이해관계들이 상충하는 사회는 그런 환상을 통해 총체적으로는 통제되어 있는 방만한 질서이기 때문에, 휴식과 놀이조차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 자유일 뿐이다. 모두가 ‘교환’이라는 욕망의 동전 놀이에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일정한 방식으로 휴식을 제공해야 효율적인 노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놀이조차 돈으로 구매하고 소비하는 교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문법의 레일을 맴도는 인생을 시인은 “잘못 배달된 화물”(「잘못 배달된 화물」) 이라 자조한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시간들을 “돌에 문자를 새겨 넣듯 고통으로 쓴다/ 인생이란 무거운 책을/ 생의 낱장마다 질척거리는 추억들을 새기는 것이다.”(「잘못 배달된 화물」)
그렇다면 세계라는 허상에 견고하게 묶여있는 시인이 진정으로 꿈꾸는 언어는 어떤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두부’라는 은유에 주목하게 된다. 시인은 아픔을 앓던 환자가 치유식을 기다리듯 새벽마다 그 소박하고 친근한 양식인 두부를 기다린다. “죄 한 점도 없는 두부를 아버지와 한 밥상에서 먹는다. 너무 많은 근심, 불면과 악몽으로 인생을 망칠 거라고 나쁜 생각에 빠지는 사람은 없다.”(「두부」) 하얗고 보드라운 두부모마다 네모의 활자판이 찍혀 있는 두부는 죄악과 근심, 불면과 악몽을 치유하는 기적의 언어에 다름 아니다. 두부는 응고된 부드러움, 명료하지만 경직되지 않은 경이로운 언어이다. 시인이 좋아하는 “눈[雪]과 은하수” “모유母乳, 새알 껍질” 혹은 ‘양’ ‘목련’ ‘벚꽃’을 닮은 하얗고 순결한 말들이다. “식인 풍습과는 무관”한 “식물의 겸손”을 가르쳐주는 양식이며 “춘분의 햇빛과 청명의 이슬” 같은 신생과 회복의 음식이다. 시인은 마치 병든 세상을 위한 약초보감이라도 기록하듯, 두부에는 “고통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고 “오열하는 이들, 악에 항의하는 자들, 대개는 평화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음식이고 “슬픔에게 쉴 자리를 내주는 선량한 사람”들이 찾는 음식이며 “우리가 두부를 좋아하는 이들과 연대할수록 갈등과 혼란들, 인종차별, 국가 간의 유혈 전쟁에서는 더 멀어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시인은 어린 세대에게 조심스레 들려주는 자연과 생명의 비밀처럼 “아가야, 지칠 때마다 두부를 먹으렴. 너를 기다리게 하는 이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두부를 먹으렴.”이라 속삭인다.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순결하고 무죄한 양식을 통해 시인은 “투명한 시와 철학이 더 번성”(「두부」)하기를 소망하고 “아침에 순하고 아름다운 것을 먹고 열심히 살아봐야겠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래서 두부가 올려진 식탁은 소박한 행복과 진실의 언어를 맛보는 시인의 성찬이자 “아침의 종교”이다.
그렇게 시가 다가오는 순간을 시인은 알고 있다. “배부름과 낮잠에는 시가 깃들지 않는다. 그런 찰나에는 결핍과 부재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 시는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이 어쩔 수 없이 토해내는 진실을 감춘 슬픔의 언어이다. “울음도/ 견딤의 한 형식”(「명자나무」)임을 “달의 뒤편에서” 자라는 ‘명자나무’처럼 오래도록 ‘그늘’을 견뎌온 시인은 알고 있다. 왜 고통과 광기는 존재의 질병이 아닌지, 현실의 이정표를 거스르는 기억이 왜 침묵이 아닌지, 세상을 등지고 걸어본 시인은 상처에서 터져나온 모든 말들이 영혼의 간증임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쓴다.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명자나무」 부분


마치 시인의 일기장처럼 느껴지는 위의 시는 시인이 시를 위해 감내하는 불행의 권리와 견딤의 자세를 읽게 한다. 그렇게 시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진눈깨비를 견디던 견인의 어느 순간, 구름과 빗물의 순리를 따르는 애잔한 언어처럼 슬픔의 흐름에도 어떤 언어가 깃들 것을 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매 순간 달라지고 변화하며 치유되고 있는 상처를 느끼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명자나무」에서 우리는 기도의 언어를 떠올리게 된다. 침묵과 상처가 스스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곳을 배회하고 돌아와 회오리치는 진눈깨비가 필요하다. “저녁의 술집을 순례”하던 일상의 자아도 죽어야 한다. 번민과 아픔의 넌출도 스러져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외로움을 혼자 견디”다 보면, 헛되고 헛된 문법과 의미들도 끝내 소멸할 것을 안다. 차가운 미학적 독백들이 메아리치는 시대에, 적어도 시라면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언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종교’가 된다. 운명적으로 다른 영혼의 장소를 살아야만 하는 시인의 언어는 노래하는 것인지 눈물을 쏟는 것인지 모를 영원과 순간의 경계에 있다. 명자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늘 환하고 당당하게 서 있던 젊은 날의 꿈꾸는 시인이 느껴져 눈물이 난다. 가지지 못한 것은 우리를 울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은 사라진 것뿐.

 

 

★ 장석주 시인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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