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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수필마당] 안윤자 - 사대문 밖 마을

사대문 밖 마을

 

 

은평구 주민이 되었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 생활한 지 9년 만의 귀환이다. 수십 년간을 명동과 청량리, 강남구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니 같은 서울의 하늘 밑이라 해도 이곳은 꽤나 낯설다. 애초의 숙원으로는 정년퇴직을 하면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야지, 벼르고 꿈을 꾸었다.
궁성이 잔재한 옛 도성의 큰 대문 안에서 역사의 공기를 호흡하고 궐 마당을 후원 삼아 들락거리며 정온히 살고 싶었다. 한데 다시 돌아온 내 거처는 도성 밖 한양의 진산인 북한산 아랫동네다. 소망을 비켜선 시계, 사대문 바깥에서 궁을 바라기 하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요즘 나는 촌티가 폴폴 묻어있는 이 소박한 마을에 정을 붙여가는 중이다. 은평의 간이역 같은 허름한 역사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 분 후면 궁궐의 대문 앞에 가서 닿는다. 중앙통에 바짝 붙어 매연과 온갖 아우성이 난무한 소요에서 살짝 비켜난 이 마을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다.
늘솔길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능선 아래 신축된 대단지 아파트다 보니 울안은 공원처럼 숲이 푸르고 폭포가 쏟아지는 너른 신천지다. 그야말로 속은 최첨단인데 정문 밖은 시골 읍내 같은 허름한 정경이 펼쳐진다. 신기한 것이 이 거리에는 아직도 전당포 간판이 붙어있다.
이제쯤은 어디서도 눈 씻고 찾기 어려운 전파사가 대로변에 버젓이 흘러간 음파를 날리고 있었다. 사람 순하게 생긴 주인은 여기 토박이로 49년째 전파사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너무도 정이 가는 가게 안으로 이끌리듯 빨려 들어 빈티지풍의 카시오(casio) 탁상시계 하나를 어울리지 않는 비싼 값을 주고 품고 나왔다. 가게 문을 여닫으며 늙어갔을 토박이 주인장을 보니 암말 없이 팔아주고 싶었다.

그쪽 어느 입구에는 벽에 딱 늘어 붙어 평수가 게딱지만 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 55년이 되었다는 시계포가 태연스럽다. 목하(目下) 그 언덕배기 빌라촌의 점방은 2대를 물려서 70년째 업을 잇는 중이란다. 무엇에 그리도 콧등이 시린지 정문 앞 상가의 번듯한 슈퍼를 놔두고 우정 허접스러운 점방을 찾아 짐을 만들어 오곤 한다. 째깍째깍 시류를 외면한 추억 속의 아날로그 잔재들이 이 동네서는 무심한 듯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 큰길을 지나다 발길이 멈춰지기에 바라보니 ‘인생술집’이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있었다. 모던과 지난 세기의 느릿한 자취가 오묘하게 혼재한 이 거리에서 몸은 최첨단의 영역에 담겨 있어도 심정만은 해묵은 흔적들에 가서 머문다. 세상 물정으로 따진다면야 단연코 최첨단의 오뚝한 자존감을 누군들 외면하랴. 허나 가슴속 풍경은 어둑했던 향수를 쫓고 있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귀향을 꼭 고향 땅으로만 한정해야 하는가? 낙향한 선비처럼 소연하고 유한(有閑)한 터전. 아직은 현란한 수도 서울의 이면처럼 느껴지는 동네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으니 고층의 아파트들이 성처럼 들어찬 이 소박한 녹번의 거리도 머잖아 눈높이를 일신하게 될 것이다.
옛 법궁이 있는 광화문의 큰 산맥으로부터 뻗어 내린 정기가 고여진 산자락 끝 뒤엣마을. 흰 구름이 재를 넘다 머물고, 청풍이 묻어오는 단아한 서재에서 나는 여기 당도하느라 숨이 찬 심신을 다스리고 있다. 이제나마 치열하게 붓을 갈고 문체를 닦을 일이다.

 

 

 

 

 

안윤자 |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저서 : 수필집 『벨라뎃다의 노래』. 역사 장편 『구름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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