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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마당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김미원-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프리드리히 횔덜린

프리드리히 횔덜린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사후 50년이 지나 하이데거에 의해 빛을 본 시인이다. 정신 분열증으로 40여 년 동안 세상에서 유폐된 삶을 살다 간 불우한 시인이란 사실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병에 걸려 고향 슈바벵으로 돌아온 갈 곳 없는 시인을 흠모한 목수가 자기 집 이층에 살게 하면서 돌보았으니 더없이 드라마틱한 삶이 아닐 수 없다.
횔덜린은 아버지를 두살 때 여의고 새 아버지마저 아홉 살 때 잃었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횔덜린이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알고 있던 횔덜린은 헤르만 헤세가 못 견디고 뛰쳐나온 규율이 엄한 마울브론 신학교를 졸업했다. 곧이어 명문 튀빙겐 신학교에 들어가 룸메이트였던 헤겔과 교류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목사 자격증을 받았지만 시를 쓰던 그는 설교대에 서지 않았다.
횔덜린은 괴테와 쉴러와 동시대를 살았다. 살아서 크나큰 명예를 누렸던 괴테와 쉴러는 횔덜린을 폄하했다. 괴테는 “규모가 작은 시를 쓰는 것이 알맞은 시인”이란 평을 했고, 횔덜린을 문단에 이끈 쉴러는 “주관적이고 과도하게 긴장되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거부함으로써 살고 있는 경험 세계가 이상적인 집착에 갈등을 안고 있어 불행한 상황에 봉착한 시인”으로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를 “속물들에게서 유리된 가련한 횔덜린”이라 했다.
목사가 되는 대신 가정 교사를 하며 시와 소설을 썼던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를 사랑했다. 불행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횔덜린은 주제테에게서 그리스적인 조화의 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휘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에도 등장한다.
주제테 역시 횔덜린의 순수를 사랑했다. 비극적인 결말을 내포한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을 하고 시인은 독일과 프랑스 등 여러 곳을 여행하고 귀향하던 중 1802년 6월 주제테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 후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는 가운데 3년 동안 그의 창조력은 활활 타올랐다. 주제테와의 이별과 그녀의 죽음이 시인에게 뮤즈가 되었고 이 시기가 그의 문학의 전성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이다. 주제테는 죽었고 횔덜린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구절이 들어간 「빵과 포도주」를 썼다.

 

이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그러나 시인들은 성스러운 한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와 같다고 그대는 말한다.
- 「빵과 포도주」

 

궁핍한 시대의 시인은 디오니소스의 성스러운 사제여야 한다고 했던 그에게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아폴론적이어야 하는 목사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생동하는 것이며 계산될 수 없는 살아있는 것’이었다.
횔덜린은 73세의 생애 중 반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36세에 정신 분열증을 앓으면서 나머지 37년을 살았다. 횔덜린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 기간은 16년밖에 되지 않는다. 1806년부터 금치산 선고를 받고 완전히 폐인이 된 그는 튀빙겐 수도원의 목수였던 시인보다 두 살 아래인 에른스트 짐머의 보호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불치의 환자이나 해를 끼치지는 않을 사람’으로 진단했다.

짐머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나는 『휘페리온』을 읽었는데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나는 횔덜린을 방문했고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영혼이 쇠진해 가는 것이 더 안쓰러웠다. 병원에서 더 이상 횔덜린을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게 되었다. 횔덜린은 자연의 친구인데 나의 방에서는 네카 계곡이나 슈타인라혜 계곡을 넘겨다볼 수 있을 터였다.

짐머는 댓가를 기대할 수 없는 횔덜린의 보호자로 역사에 남았다. 횔덜린의 어머니는 182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을 20년간 찾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독일의 물신주의를 혐오했던 시인 횔덜린만큼이나 영혼이 맑았던 짐머의 배려로 네카강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다섯 개 있는 이층 방에서 묵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예수님도 목수였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죽자 딸이 횔덜린을 보살폈다. 이 집에서 시인은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시를 썼다.
나무 냄새를 머금은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밤이었을 것이다. 횔덜린은 1843년 6월 7일 밤 11시 창을 통해 달을 올려다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그렇게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시인의 임종을 지켰던 짐머의 딸 로테는 말했다.
슈바벵 네카 강변에 위치한 횔덜린 탑을 찾아간 8월 하순의 아침은 화창했다. 공기는 투명했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뭉치 큰 구름들이 한가롭게 떠다녔다. 횔덜린이 창을 통해 내다보았던 맑고 푸른 강은 늘어진 버드나무 그늘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선명하게 드리웠다. 노란 집의 뾰족한 지붕이 동화 같은 느낌을 주었다.

화재로 불에 타 1875년에 다시 지었다고 하는 집의 외벽 노란 페인트칠은 선명했고 횔덜린의 방 연갈색 마룻바닥도 삐꺽거리지 않았다. 아무런 가구도 없이 의자 두 개가 강을 등지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여러 송이의 해바라기가 화병에
담겨 있었다. 열린 창으로 횔덜린이 들이마셨을 훈훈한 바람이 들어왔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고 시인의 소명을 고민했던 시인, 73년의 인생 중 반만 살았던 시인, 그러나 죽을 때까지 시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시인 중의 시인을 생각하며 집을 나와 바깥 정원을 오래 서성였다.
그의 방 바로 아래에 하늘을 응시하는 나체 청동상이 있었다.
그는 튀빙겐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었다. 그의 묘지는 가장 기본적인 무덤의 역할만 충실히 할 정도로 단촐했다. 묘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생몰연도만 적혀있었다. 높이 1.7미터 정도의 대리석도 화강암도 아닌 무른 석회암 같은 비석위에는 누군가 올려놓은 자그마한 돌들이 오순도순 놓여있었다. 그가 죽은 지 1년 후 의붓동생은 묘비에 새길 시로 횔덜린의 시 「운명」 의 마지막연을 골랐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정신의 가치를 잃어가는 사회에서 시인의 역할을 강조했으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어 목수의 보호를 받아야했던 날개 꺾인 횔덜린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안톤 슈낙의 수필처럼 우리를 슬프게 한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감옥 같았던 지상에서 갖지 못했던 것들을 하늘나라에서 찬란하고 자유롭게 누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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