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마당

(36)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심웅석 - 안개 안개 입춘이 지나면서 앞산에 안개 끼는 날이 많아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산자락을 보면 신비스럽고 푸근하다. 우리 인간들의 복잡한 속내를 모두 덮어버리는 모습이다. 최선의 선(善)을 놓고 경쟁하는 아름다운 다툼이 아니라, 나의 주의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상대를 괴멸시키려는, 인간들의 허물을 인자하게 덮어주려는 신의 손길 같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희뿌연 안개를 바라보면, 살면서 느꼈던 그에 대한 기억들이 마구 달려온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는, 이른 아침에 앞치마에 손 씻으며 웃고 나오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곤 했다. 새벽하늘에 별들이 돌아갈 무렵, 안개가 걷히면서 논둑 위에 송아지가 ‘음매-애’하고 어미 찾아 울 때면 고향마을은 한없이 평화스러..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손거울 - 짱돌 짱돌 강물은 아침 안개를 품은 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 건너에는 그들의 아지트인 빈집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 결전의 시간이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니느냐 아니면 다시 목동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있다. 어떻게 해서 얻은 기회인데 학업의 중단은 없다.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내주먹보다 큰 반들거리는 짱돌하나를 가방 도시락 케이스 옆에 집어넣는다. 물론 젊은 선생님의 후원이 힘이 된다. 혼자지만 혼자는 아니다. “계율아 니가 그냥 지나가면 너의 후배들도 당한다. 단단히 각오해라 내가 있다;” 하신 말씀에 힘을 얻는다. 아지트 입구 쪽을 조심스럽게 지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담배를 꼬나물고 나타난 셋 놈이다. 나보다는 몇 살씩 더 먹어 보인다. “야 이 촌놈 어..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박현섭 - 접목 접목 올해처럼 숫자에 민감해 본 적이 없다.‘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 확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하던 숫자가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두더지 게임처럼 온 세상사람들 정신 줄을 쥐고 흔들어댄다. 하루하루 요동을 치는 숫자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가슴 조리는 불안이 목울대를 짓누르는 사이, 시간은 어이없이 반년을 훌쩍 넘겨 가을길목의 착잡한 일상으로 이어진다. 계절모퉁이를 돌아들며 숨죽이는 신음들이 안팎으로 낭자하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리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던 지난봄은 우리에게도 더없이 잔인한 날이었다. 제대로 드나들 수 없는 중환자실에 갖가지 기구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맞닥뜨린 남편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결에 지끈 감았던 눈을 뜨며 그에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 “고맙습니다”였다. 다른 어떤 말로는 눈을 맞출 수 없는..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곽영호 - 두부 한 모 사오세요 두부 한 모 사오세요 지는 해도 피곤한가보다. 게으름뱅이 하품하듯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모두가 하루를 내려놓으려는 듯 몸을 눕힌다. 내 그림자도 늘어져 휘청거린다. 흐느적거리는 것은 깔끔한 모습이 아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그림자를 기다랗게 느려 치렁거리는 것은 온전하게 마무리를 하지 못한 미완의 모습이다. 찜찜한 기분으로 터덜거릴 때 전화벨이 울린다. 나의 동선을 꿰뚫고 있는 아내다. “두부 한 모 사오세요. 나 두부 살줄 모르는데. 두부 못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부침 할 거라고 하면 알아서 줘.” 일갈한다. 농부가 갈아엎어 놓은 흙속에서 굼벵이 제집 찾아가듯 두부 집을 더듬는다. 저녁시장거리에는 여인들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광고문구가 선명한 바퀴달린 가방을 모두가 끌고 다닌다. 어쩌다가 저녁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수필마당] 김숙경 - 직진이 아닌 좌회전 직진이 아닌 좌회전 봄날 분주함을 보태는 일이 생겼다. 가게 임대 만기에 맞춰 월 40프로 인상된 점포에서 굳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이전해야 했다. 추운 날씨를 감안해 봄 까지 연장해 주겠다는 임대인의 선심보다 먼저 봄이 급속도로 가까운 곳에 와 있다. 봄이 오려면 아직은 한참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발등에 꽃 같은 불이 붙었다. 가진 자의 횡포라고 생각하면 그뿐이겠지만 그들도 나름 사정이 있을 거라는 이유도 헤아려본다. 없는 자의 서러움이 깊으면 지금보다 더 값싼 곳을 얻어 나가면 된다. 감당 안 되면 우리처럼 떠날 수밖에 없는 일 어쩌랴. 이제 자리 잡고 안정됐나 싶은데 턱없는 임대료 인상에 주인과 대판 싸웠다는 옆 가게 칼국수집,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디시마트, 신발가게, 세탁소..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종미 - 다 뻥이었어요 다 뻥이었어요 연속극을 보다가 이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다.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낮선 아주머니를 열 받게 해놓고 태연하게 자리를 뜬 창의적이지만 엉뚱했던 그 아이. 웹툰 작품이 안방극장으로 들어왔다. 김새로이와 조희서가 주인공인 ‘이태원 클라쓰’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약자 앞에 정의롭고, 강자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 소신파이지만 소시오패스에 가까울만큼 지나친 정의주의자다. 금권력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마저 잃은 김새로이가 길을 가던 중 어떤 아주머니한테 폭행을 당하는 조희서를 만난다. 8월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배고픈 시어머니 낯 색 버금가던 오전 날씨와 달리 점심식사 후 드디어 보슬비가 내렸다. 뽀얗게 먼지 입은 나무들도 모처럼 온몸 뒤적이며 목욕하느라 분주하다. 우산도 없이..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순애 - 호사(豪奢) 또는 好事 호사(豪奢) 또는 好事 자연의 맛을 본다. 동쪽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짭조름함을 깊이 음미한다. 잉태 되었던 모태에서의 친숙함이 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남쪽마당의 숲을 뚫고 달려온 솔바람은 머리를 노크하고 가슴을 열게 해 강한 의지가 솟아오른다. 그 의지의 힘을 입은 손길로 구석구석 풀을 매고 꽃을 심는다. 꽃은 이미 사랑과 향기를 약속 했노라 땀을 뿌린 만큼씩 자라난다. 사람의 가슴에 사랑이 되고 삶의 희망이 되어 하루가 기쁨으로 다가온다. 호사다. 한 생명의 태어남은 하늘만큼 부푼 기대를 안겨준다. 그것이 꽃 한 송이라 해서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안다. 대모님이 꽃모종을 한 묶음 주면서 꽃이 피면 예쁘다고 심어보란다. 한 개씩 갈라 나란히 심었다. 뾰족한 잎을 힘차게 뻗쳐 꽃이 어떻게 생겼..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김윤희 - 건들팔월 건들팔월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 했던가./들녘 일손 잠시 쉼을 갖는 농촌의 8월은/신작로 미루나무에서 매미소리 요란 했고,/덩달아 꿈을 키우는 젊은 열기가 후끈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회,/농촌을 지키며 농사일을 거들던 친구도/객지로 나가 생활전선에 뛰어든 친구도/상급학교 진학한 친구도 격의 없이 뭉쳤다. 콩나물시루 속, 빼곡했던 한 교실 친구들이/졸업사진을 찍던 그 교정에 다시 모여들었다./구레나룻 거뭇거뭇 훌쩍 자란 친구가 새롭고/고운 꿈 꼭꼭 땋아 내린 갈래머리가 함초롬하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졸업한 지 불과 5년 전인데 친구들의 모습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단발머리 철부지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처녀총각 티가 물씬하다. 당시 고등학교..